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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왕실 미스테리 ㅡ 소현세자의 죽음

하이딩 2016. 12. 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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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왕실 미스테리 ㅡ 소현세자의 죽음

 


늘 하던대로 세계사(?) 공부를 해보도록 합시다. 스킵하시려면 사진으로 가시면 되지만 되도록이면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잖아요.

 

일단 조선에는 역사책에 늘 나오는 '붕당정치'란 것이 있었음. 붕당정치 이야기를 하려면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하지만 너무 어려우면 안 되니까 짧고 중요한 부분만 정리하겠음. 붕당은 관리들이 여러 파로 나뉘어서 서로 대립하는 걸 뜻함. 광해군 집권 당시 조정은 '북인' '남인' '서인'으로 나뉘어져 있었음. 광해군 때 집권한 당파는 '북인'임.

 

당시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이 '후금'을 세우며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고 있었음.

하지만 당시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존화주의'란 것이 있었음. 또한 '서인' 들은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우리를 구해줬으므로 조선도 명나라를 도와야한다. 또한 후금은 만주족이므로 오랑캐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음. (후금은 후에 청나라가 됨.)

 

이 때 만주족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명나라가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함. 광해군은 '강홍립'이라는 장수를 보내면서 상황을 보고 여차하면 후금에 투항해버리라고 명령함. 이 것이 광해군이 추구하던 중립외교, 내지는 실리외교라고 할 수 있음. 이제 서인님들은 난리가 난 거임. 아니 어찌 우리 조선이 명나라와의 대의를 저버리고 오랑캐와 협력할 수 있쏘!!!!!!!!!!

 

또한 광해군은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일이 있었음. 이게 어찌된 일이냐면,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에게는 후궁 소생 자식들밖에 없었음. 결국 서자인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됨. 그 후 선조는 51세 때 15살의 인목왕후에게 새장가를 듬 (ㅎㄷㄷ) 근데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은 거임. 비록 선조가 승하할 때 영창대군이 너무 어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긴 했음. 하지만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들의 눈에는 영창대군이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었음. 중전 소생의 영창대군이 있는 이상, 후궁 소생의 광해군의 입지는 좁아질 수 밖에 없는 거였으니까.

 

결국 서인은 인목대비 유폐사건, 영창대군을 죽인 일, 명나라에 대한 대의를 저버리고 오랑캐와 협력한 일 등을 들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일개 왕족이었던 인조를 왕으로 추대함. 이 것이 그 유명한 인조 반정 되시겠음. 북인은 광해군 폐위와 동시에 몰락하고 서인이 권력을 잡게 됨.

(이후로는 서인과 남인의 붕당정치 시작임. 대표적으로 장희빈=남인, 인현왕후=서인)

 

 

인조가 통치하던 1627년, 후금은 조선에 1차 침입을 함. 이 것이 정묘호란임. 조선은 후금의 요구로 형제의 맹약을 맺고 무역을 시작하지만,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의'로 바꾸자고 요구함. 또한 황금 1만냥 등 무리한 사항들을 요구하고 변방의 백성들을 수탈함. 이에 조정에서는 후금과 화친하지 말자는 '척화배금' 사상이 생겨나고, 선전 포고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남.

 

1632년 2월, 인조의 왕비가 사망함. 후금의 장수 몇몇이 문상차 조선을 찾아와서는 군신의 의를 강요하자 분노폭발해서 후금 사신들을 가둬버림. 사신들은 망했다...를 직감하고 민가의 말을 빼앗아 도주함. 이 일로 후금은 조선에 대한 침입을 재차 결심하게 됨.

 

1632년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침. 이 때 조선 사신이 참석했는데, 청은 왕자를 볼모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고 협박하지만 씨알도 안 먹힘. 같은 해 11월에 왕자와 척화배금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보내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지만 또 한번 묵살당함.

 

1636년 12월 1일, 청나라 황제가 직접 쳐들어옴. 이것이 병자호란. 자세한 과정 다 생략하고 말하자면, 인조는 청나라가 쳐들어온지 2주만인 14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감. 남한산성에 있는 얼마 안 되는 식량으로 버티고 버티다가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삼전도로 향해 신하의 예를 행함. 이 것이 '삼전도의 굴욕' 임. 이후 인조는 서울로 돌아오지만, 세자와 둘째 봉림대군은 다른 대신들 및 백성들과 함께 볼모로 잡혀가게 됨.

 

청에 잡혀간 세자가 소현세자이고, 봉림대군은 후에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이 됨.

 

 

 

사진이 없는 관계로...추노에 나오셨던 소현세자의 사진임.(....죄송합니다...)

 

 

소현세자는 광해군 집권 당시 태어나는데, 인조의 행각을 살펴보면 인조 자체가 그리 정이 많은 사람은 아닌 듯 함. 몇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음.

 

인조가 왕이 될 때 소현세자는 12살이었음. 당시 세자를 책봉하려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승인을 받아야했는데, 인조는 신하들의 거듭된 건의를 뚜렷한 이유 없이 묵살함. 결국 세자가 명나라의 승인을 받고 정식으로 인정 받은 것은 23살이 되던 해였음. 또한 광해군은 세자와 관련해 늘 특별 포상을 베풀고 세자의 건강 문제까지 직접 챙겼지만, 인조는 그런 면이 보이지 않았음.

 

특히 세자는 궁궐에 들어올 때 이미 세자 교육을 시작할 나이가 지난 상태였음. 대부분의 세자들은 8살에 책봉되고 동궁에서 세자 교육을 받는 것이 흔한 일이였음. 특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은 매일 세자의 공부 진도를 캐묻고 다음 공부 일정을 신하들과 직접 의논하는 것이 일상이었음. 하지만 인조는 신하들이 세자의 공부가 미비하다고 해도 알아서들 잘 해라~ 이렇게 세자를 방치함.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인조 자체가 자식들에게 살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음.

 

 

 

또한 요즘들어서는 소현세자가 매우 의젓하고 늠름하게 나오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음.

병자호란 당시 세자의 나이는 25세였는데, 실록에는 세자가 울음을 터뜨리는 내용이 나옴.

세자를 따로 피난시키자는 의논이나, 항복을 피할 수 없으니 세자를 볼모로 보내자...

즉 세자 자신의 안위와 관련된 내용이 나올 때만 울음을 터뜨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임.

 

또한 산성일기에 따르면, 세자는 최명길 등 대신들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를 지름.

"너희 때문에 우리가 죽게 생겼다, 어찌 책임 질 테냐!" 하며 다소 철없는 모습도 보임.

 

 

 

어쨋든 세자는 동생 봉림대군 부부와 함께 청나라로 끌려감.

 

세자는 상당히 골치가 아팠을 거임. 잦은 병에 시달렸고,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의식에도 참석해야했으며 조선의 입장을 청에 설명하는 외교관 노릇도 해야했으며, 청나라의 무리한 물자 요구를 어떻게든 조정하기 위해 진땀을 빼는 생활의 반복이었음. 젖먹이 아들을 조선 땅에 놓고 와야했으며, 또한 아버지 인조는 틈만 나면 세자가 되어 오랑캐 앞에서 근신하지 못한다...등의 이유를 들어 타지에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아들을 꾸짖었음. 하지만 세자는 매일 아침마다 인조가 있는 한양 쪽에 절을 하는 '망궐례'를 하며 하루 빨리 조국으로 돌아가는 꿈을 꿈.

 

다른 이야기 다 생략하고 중심적인 사건들만 다루겠음. 1640년, 세자는 끌려간지 3년 만에 일시 귀국함. 인조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이유였는데 세자가 귀국하는 대신 세자의 아들과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이 볼모로 청나라에 감. 인조는 크게 분노하며 세자 귀환을 청나라에 요청했던 사신들을 처벌해버림. 세자는 한 달만에 청나라로 돌아가는데, 청나라 조정이 생활비를 끊어버리자 세자 일행은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해야했음.

 

세자는 청나라에서 '아담 샬'이라는 신부를 만나게 됨. 신부는 천주교를 전해주기 위해 중국에 와 있었는데, 세자가 귀국할 즈음 신부는 신학 서적, 역법서 등 일종의 '신문물'을 줌. 당시 세자는 문화적인 충격을 겪으며 서구 문물에 눈을 뜨고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무사히 왕이 돼었더라며 폐쇄적인 성리학의 시대는 끝나고 훨씬 빠르게 자발적인 근대화를 시작했을 거라는 주장도 있음.

 

또한 세자의 아내인 '강빈'은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상당히 영웅적인 여성이었음. 포로로 잡혀 있는 입장에서 활발한 무역을 해서 재물을 축적했음. 하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일종의 미친 짓이었음. 귀한 신분의 여인이 상거래를 한다는 건 당시의 유교적인 시각에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음. 귀국 1년 전인 1644년 강빈의 아버지가 사망함. 세자 부부는 조선을 방문하는데, 이 때 인조는 극도로 싸늘하게 세자를 대했고 강빈은 부친 묘 참배와 어머니 방문조차 허락받지 못했음.

 

1645년 2월, 세자는 8년만에 귀국함. 하지만 인조는 세자의 귀국을 기뻐하지 않았음. 이 엄청난 경사를 축하하는 대사령은 커녕 특별 과거 등도 없었음. 또한 세자에게 처한 입장에 어울리지 않게 사치스럽다, 오랑캐 물이 들었다 등의 따가운 시선도 상당했음.

 

그리고 2달후인 4월 23일, 세자는 3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됨.

비록 병에 시달리긴 했지만 낯선 청나라 땅에서도 온전히 살았던 세자가 갑작스레 사망하게 되자 독살 의혹이 불거져 나옴. 실록의 본문에서는 세자 부부를 미워했던 인조의 후궁, '조귀인'을 넌지시 지목함. 하지만 누군가 세자 암살을 시도했다면 왜 진상 조사가 없었던 것일까? 요즘 와서는 인조가 직접 세자 독살을 지시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음.

 

논란이 되는 기록 몇가지를 살펴보겠음

[소현세자의 졸곡제를 행하였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와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ㅡ글쓴이가 법의학에 관심이 있으므로 몇몇 내용을 말해보도록 하겠음.ㅡ

 

졸곡제는 소현세자 사망 후 2달이 지난 6월 27일에 했음.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다'는 기록은 약물 중독에 의한 것보다는 그저 단순한 '부패'로 보는 것이 맞음. 약물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중독에 의해 시체에 생기는 시반은 황갈색, 녹갈색, 선홍색, 적갈색, 심청색 등 다양함. 하지만 약물 중독으로 시체가 검게 변했다는 것은 법의학적 시각에서 받아들이기 힘듬. 또한 시체가 부패되면 부패가스에 의해 뱃속의 압력이 높아짐. 이로 인해 부패액이 코와 입을 통해 흐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단 이야기도 부패의 경우라고 볼 수 있음.

 

 

진실이야 어찌 됐든,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음. 인조는 강빈이 오랑캐들과 무역을 했다는 이유로 며느리를 매우 미워했음. 진실이야 어쨌든 세자는 병으로 죽었음. 세자가 병사한 경우, 세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법도였음. 심지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폐위됐음에도 왕위에 오를 정도였음. 하지만 인조는 대부분의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함.

 

또한 1646년, 수랏상에 오른 전복구이에 독이 있다는 이유로 대뜸 강빈을 모시던 나인들을 문책하는 일이 벌어짐. 사건 발생 한 달만인 3월 15일, 강빈은 폐위 되어 궁을 나가고 즉시 사사됨. 그 직전에는 강빈의 남동생 두 명이 매를 맞다가 죽었고,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셋 또한 제주도로 유배됨. 첫째와 둘째는 풍토병으로 죽고, 셋짜 이석견만이 살아남음.

 

 

추노에서 오지호가 안고 도망치던 이 아이가 바로 소현세자의 막내아들 이석견임.

실제 역사에 따르면, 이 아이는 효종 7년 경안군으로 복위되지만 이내 사망함ㅠㅠ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음. 지금 소현세자의 무덤을 파헤쳐 부검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며, 다만 소현세자가 극도의 절망 속에서 죽었다는 것만은 사실로 인정할 수 밖에 없음. (야사에 나오는 인조가 던진 벼루를 맞았다라는 이야기는 알 수 없음. 다만 인조의 극심한 꾸짖음으로 절망하며 병을 앓다가 죽은 것이란 설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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